맨위로가기

루이 12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이 12세는 1462년에 태어나 1498년부터 1515년까지 프랑스의 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오를레앙 공작 샤를과 마리 드 클레브의 아들로, 1476년 루이 11세의 딸 잔과 결혼했으나, 왕위에 오른 후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하기 위해 결혼을 무효로 했다. 루이 12세는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밀라노 공국을 차지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국내에서는 재정 개혁과 세금 징수 개선을 통해 '국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세 번 결혼했으며, 1515년 사망 후 사촌이자 사위인 프랑수아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발루아오를레앙가 - 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은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아들이자 샤를 6세의 동생으로, 섭정권 다툼과 불륜, 암살 등으로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의 조상이다.
  • 발루아오를레앙가 - 장 드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 백작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사생아로, 백년 전쟁과 프랑스 내전에서 활약했으며,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잔 다르크와 함께 영국군을 물리치고, 프라게리 반란과 공익 동맹에 참여했다가 1468년에 사망했다.
  • 블루아 출신 - 오귀스탱 티에리
    오귀스탱 티에리는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자유주의 사상가로, 앙리 드 생시몽의 비서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 혁명 연구와 더불어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 《메로빙거 왕조 시대 이야기》 등의 저서를 통해 프랑스 역사 연구에 기여했으며, 그의 저술은 낭만주의적 역사 서술의 특징을 보인다.
  • 블루아 출신 - 세드리크 바로
    세드리크 바로는 2006년 OGC 니차 소속으로 쿠프 드 라 리그 결승전에 출전하여 준우승을 차지한 프랑스 축구 선수이다.
  • 1462년 출생 - 정현왕후
    정현왕후는 조선 성종의 계비로서 중종의 어머니이며, 1462년에 태어나 1480년 왕비가 되었고, 연산군 즉위 후에는 왕대비, 중종반정 이후에는 자순화혜왕대비로 불리다가 1530년에 사망하여 선정릉에 안장되었다.
  • 1462년 출생 -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 분쟁의 중심인물로, 엔리케 4세의 딸로 인정받았으나 사생아 의혹 속에 이사벨 1세와 왕위를 다투다 왕위 계승권을 잃고 자신을 여왕으로 여기며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루이 1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루이 12세 52세 초상화
1514년의 루이 12세
칭호'프랑스 인민의 아버지 (Le Père du Peuple)'
출생일1462년 6월 27일
출생지블루아 성
사망일1515년 1월 1일 (52세)
사망지오텔 데 투르넬
매장일1515년 1월 4일
매장지생드니 대성당
배우자잔 드 프랑스 (1476년 결혼, 1498년 이혼)
안 드 브르타뉴 (1499년 결혼, 1514년 사망)
메리 튜더 (1514년 결혼)
자녀클로드 드 프랑스
르네 드 프랑스
미셸, 부르주 대주교 (사생아)
왕가발루아-오를레앙 가
왕조발루아 왕조
아버지샤를, 오를레앙 공작
어머니마리 드 클레브
루이 12세 서명
루이 12세 서명
통치 정보
계승프랑스 국왕
통치 기간1498년 4월 7일 – 1515년 1월 1일
이전 통치자샤를 8세
다음 통치자프랑수아 1세
대관식1498년 5월 27일, 프랑스
계승밀라노 공작
통치 기간1499년 9월 6일 – 1512년 6월 16일
이전 통치자루도비코 스포르차
다음 통치자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계승나폴리 왕
통치 기간1501년 8월 2일 – 1504년 1월 31일
이전 통치자페데리코
다음 통치자페르디난도 3세

2. 초년

1462년 6월 27일 투렌의 블루아 성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는 샤를, 오를레앙 공작이었고 어머니는 마리 드 클레브, 오를레앙 공작부인이었다. 아버지 샤를은 아쟁쿠르 전투 이후 잉글랜드 왕국에서 25년간 포로 생활을 했으며,[26] 루이가 태어났을 때는 거의 70세였다. 루이는 146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불과 3살의 나이로 오를레앙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3][26]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오를레앙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의 긴밀한 관계를 경계하며 오를레앙 가문 출신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1476년, 루이가 14살이 되던 해에 루이 11세는 자신의 딸 잔 드 프랑스와 루이의 결혼을 명했다.[26]

1483년 루이 11세가 사망하고 그의 13세 아들 샤를 8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샤를 8세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누나인 안 드 프랑스가 섭정을 맡았다. 왕국의 운영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1484년 투르에서 전국 신분회가 소집되었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제2신분(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제1신분(교회)은 부르주 실용제의 복귀를, 제2신분(귀족)은 외국인이 군 지휘관을 맡는 것을 금지할 것을, 제3신분(평민)은 세금 감면과 왕실 지출 축소를 요구했다. 모든 신분은 관직 매매 중단에 동의했지만, 회의는 뚜렷한 성과 없이 해산되었다.

루이는 섭정 안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1485년부터 1488년까지 귀족들과 연합하여 광인의 전쟁이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루이는 프랑수아 2세, 브르타뉴 공작과 동맹을 맺었으나, 1488년 7월 28일 생토방뒤코르미에 전투에서 왕군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투옥되었다.[4][26]

1491년, 3년간의 투옥 생활 끝에 사촌인 샤를 8세에 의해 사면되어 석방되었다.[26] 이후 1494년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샤를 8세를 따라 참전했다. 그는 군대의 후위를 지휘하며 제노바를 점령했고, 이후 북부 이탈리아에 머물며 밀라노 공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26]

루이가 기도하는 모습, 성인들과 함께, 개인적인 기도서인 1498-99년의 루이 12세의 기도서, 게티 미술관. "이 이름을 가진 루이 12세: 36세에 제작됨"이라고 새겨져 있다.


샤를 8세와 그의 왕비 안 드 브르타뉴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모두 유아기에 사망하면서, 살리카법에 따라 샤를 5세의 증손자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26] 결국 1498년 4월 7일, 샤를 8세가 사고로 사망하자 루이가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하여 루이 12세로 즉위했다.

3. 재위

루이 12세는 1498년 사촌 샤를 8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직후, 그는 브르타뉴를 프랑스 왕국에 계속 묶어두기 위해 샤를 8세의 미망인이었던 안 드 브르타뉴와 1499년 결혼하였다. 안 드 브르타뉴와 추기경 조르주 당부아즈는 루이 12세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루이 12세의 재위 기간은 이탈리아 전쟁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할머니 발렌티나 비스콘티를 근거로 밀라노 공국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했고, 샤를 8세로부터 나폴리 왕국에 대한 주장도 이어받았다. 1499년 프랑스군은 밀라노를 점령하여 12년간 통치했으나, 1513년 스위스 용병에게 밀라노를 다시 빼앗겼다. 나폴리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아라곤 왕국과 분할을 시도했으나, 전쟁 끝에 1504년 상실했다. 또한 1508년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여 베네치아와 싸웠으나, 이후 결성된 신성 동맹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밀려났다.

대외 전쟁에도 불구하고 루이 12세는 법률 및 재정 개혁, 감세 등 국내 정책에 힘써 1506년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로부터 '국민의 아버지'(Père Du Peuple프랑스어)라는 칭호를 받았다.

루이 12세는 세 번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아들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1514년 왕비 안 드 브르타뉴가 사망하자, 같은 해 잉글랜드의 메리 튜더와 재혼했으나 몇 달 뒤인 1515년 1월 1일 사망했다[26]. 살리카법에 따라 왕위는 그의 종질이자 사위인 앙굴렘 백작 프랑수아가 프랑수아 1세로 즉위하며 계승했다.

3. 1. 프랑스 왕위 계승

샤를 8세의 아들이 요절했기 때문에, 당시 오를레앙 공작이었던 루이는 발루아 왕조의 가장 가까운 방계 혈족으로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26]. 1498년 샤를 8세가 사고로 사망하자 루이 12세로 즉위했다.

프랑스 왕위 계승은 남성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규정한 살리카법을 따랐다. 루이 12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왕위는 그의 종질이자 사위인 프랑수아에게 돌아갔다. 프랑수아는 사보이의 루이즈와 앙굴렘 백작 샤를의 아들이었으며, 루이 12세의 장녀인 클로드 드 프랑스와 결혼했다. 루이 12세는 야심을 가진 사위 프랑수아를 끝까지 경계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은 여성을 통한 계승을 허용하는 반(半)살리카 전통을 따랐다. 루이 12세의 왕비이자 브르타뉴 여공작이었던 안이 루이 12세보다 먼저 사망하자, 그들의 장녀인 클로드가 루이 12세의 사망 전에 브르타뉴 공작위를 상속받았다. 클로드가 프랑수아 1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수아 1세는 아내의 권리(jure uxoris|유레 우소리스la)에 따라 브르타뉴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를 통해 브르타뉴는 프랑스 왕국의 일부로 남게 되었고 왕국의 통일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3. 2. 결혼과 브르타뉴 문제

1476년, 루이 12세는 당시 국왕이었던 사촌 루이 11세의 왕명에 따라 그의 딸 잔과 결혼해야 했다.[26] 루이 11세의 아들 샤를 8세1483년 왕위에 올랐으나, 1498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는 루이 12세에게 넘어갔다. 샤를 8세는 생전에 프랑스 왕국과 사실상 독립 상태였던 브르타뉴 공국을 통합하기 위해 브르타뉴의 상속녀였던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했었다. 루이 12세는 이 통합을 유지하고자 왕위에 오른 직후인 1498년 12월, 첫 부인 잔과의 혼인 무효를 추진하고 샤를 8세의 미망인이 된 안과 결혼하기로 결정했다.[26]

루이 12세는 본래 잔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혼인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당대 가장 추악한 소송 중 하나"로 묘사될 만큼 논란이 많았다. 루이는 일반적인 혼인 무효 사유인 근친혼 대신, 잔이 신체적으로 기형이어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매우 상세하게 기형을 묘사했다. 또한 자신의 성적 능력이 마법에 의해 억제되었다고도 주장했다. 이에 잔은 루이가 "밤에 세네 번 아내와 관계를 가졌다"고 자랑했다는 증언을 제시하며 격렬하게 반박했다. 교황청이 중립적이었다면 증거가 부족한 루이의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나,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전쟁 계획을 지지하는 등 정치적인 이유로 혼인 무효를 승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교황은 루이가 잔의 아버지 루이 11세에 의해 강제로 결혼했기 때문에 결혼이 무효라고 판결했다. 잔은 이에 분개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고 수녀가 되었으며, 훗날 1950년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499년, 루이 12세는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했다. 안은 샤를 8세와의 사이에서 여러 차례 사산하거나 아이를 일찍 잃었었는데, 루이 12세와의 사이에서도 네 명의 아들을 사산했지만 두 딸, 클로드(1499–1524)와 르네(1510–1575)가 살아남았다. 루이 12세는 아들 후계자를 원했으나 얻지 못하자, 브르타뉴가 프랑스 왕령으로 남도록 하기 위해 장녀 클로드를 자신의 추정 상속인인 프랑수아와 약혼시켰다. 본래 클로드는 어머니 안의 뜻에 따라 1501년 미래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약혼했었으나, 루이 12세가 이를 파기한 것이다. 안은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1514년 그녀가 사망한 후에 클로드와 프랑수아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클로드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었고, 프랑수아 1세의 왕비가 되었다. 차녀 르네는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2세 데스테와 결혼했다.

1514년 1월 9일, 왕비 안이 사망하자 루이 12세는 잉글랜드를 신성 동맹에서 떼어내고 아들 후계자를 얻으려는 마지막 시도로, 같은 해 10월 9일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1515년 1월 1일에 사망했다. 사인은 통풍의 영향으로 추정되지만, 젊은 왕비와의 결혼 생활로 기력이 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26] 메리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으며, 결국 왕위는 루이 12세의 사촌이자 사위인 프랑수아 1세에게 계승되었다.

메리 튜더, 루이 12세의 세 번째 부인

3. 3. 이탈리아 전쟁

프랑스 왕국베네치아 공화국의 위협으로부터 밀라노 공국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샤를 8세 치세인 1494년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키며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당시 밀라노 공국은 유럽에서 가장 번영한 지역 중 하나였다. 당시 오를레앙 공작이었던 루이는 이 원정에 샤를 8세를 따라 참전했다. 프랑스 왕국의 침략은 루도비코 스포르차 밀라노 공작의 지원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나, 이는 1494년부터 1559년까지 이어진, 소위 이탈리아 전쟁이라 불리는 일련의 전쟁을 촉발했다.

루이 12세의 청동 대포, 고슴도치 문장. 구경: , 길이: , 무게: . 알제에서 1830년에 회수됨. Musée de l'Armée.


루이 12세가 제노바를 공격하기 위해 알레산드리아를 떠나는 모습, 장 부르디숑


1495년,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입장을 바꿔 반프랑스 베네치아 동맹에 가담하며 프랑스를 배신했다. 이로 인해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1495년 7월 6일 포르노보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였고,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깊은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프랑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루이는 할머니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권리를 근거로 밀라노 공국이 자신의 상속 재산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제 위기로 약화된 밀라노 공국을 정복하려 했고, 1495년 6월 11일 노바라 시를 점령했으나, 루도비코의 아내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길고 힘든 포위 공격 끝에 결국 패배했다.[5][6]

1498년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1499년부터 1504년까지 이어진 이른바 '루이 12세의 전쟁'을 통해 밀라노 점령 야욕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전쟁 시작에 앞서 루이 12세는 국제적 위협 요소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다. 1498년 8월,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헨리 7세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으나, 헨리 7세가 아들 아서와 스페인 공주 아라곤의 캐서린의 결혼을 추진 중이었기에, 먼저 스페인을 잉글랜드와의 긴밀한 관계에서 떼어놓아야 했다. 당시 스페인은 반프랑스 베네치아 동맹의 일원이었고, 아라곤의 페르디난트 2세는 프랑스에 매우 적대적이었다.[7] 그럼에도 루이 12세는 1498년 8월, 스페인과 상호 우호 및 불가침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하여 영토 분쟁을 잠시 접어두었다.

이를 통해 루이 12세는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갱신할 여유를 확보했다. 1499년 초,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간의 오랜 동맹(오래된 동맹)이 부활하면서 잉글랜드의 관심은 스코틀랜드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주요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루이 12세는 국경을 맞댄 스위스 연방 및 사보이 공국과의 협상에 나섰다. 1499년 3월, 스위스와 협정을 맺어 연간 20,000 프랑을 지급하는 대가로 스위스 용병을 모집할 권리를 얻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스위스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5월에는 사보이 공국과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군이 사보이를 통과해 밀라노로 진군할 수 있게 되었고, 사보이에서 군수품 조달 및 병력 모집도 가능해졌다. 이로써 루이 12세는 이탈리아 침공 준비를 마쳤다.

샤를 8세 시기 강력했던 프랑스군은 방치되어 약화되었으나, 루이 12세는 즉위 후 군대를 재건했다. 1499년 8월 10일, 프랑스군은 사보이를 거쳐 아스티를 지나 밀라노 공국 국경을 넘었다. 군대는 외국인인 잔 자코모 트레불치오가 지휘했는데, 그는 밀라노 출신이지만 루이 11세 때부터 프랑스 왕실에 봉사해왔다. 총 27,000명의 병력(기병 10,000명 포함)과 5,000명의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은 먼저 요새 도시 로카 디 아라초를 포위했다. 5시간의 포격 끝에 성벽이 무너지자, 루이 12세는 저항하는 다른 도시에 경고를 보내기 위해 수비대와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 학살은 정당한 영주인 루이 12세에게 대항한 반역 행위에 대한 처벌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다음 목표인 카스텔로 디 안노네에서도 학살이 반복되자, 다른 세 요새 도시는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알레산드리아로 진격하여 8월 25일부터 포격을 시작했고, 8월 29일 도시가 항복하자 수비대와 총독은 밤중에 도시를 빠져나갔다.

트레불치오 원수는 베네치아군이 동쪽에서 밀라노를 돕기 위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마지막 요새 도시인 파비아로 군대를 진군시켰다. 프랑스군이 밀라노 서쪽 파비아 근처까지 도달하자,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1499년 9월 2일 밤, 기병대와 함께 밀라노를 떠나 북쪽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주했다. 리옹에 머물던 루이 12세는 9월 17일 밀라노 항복 소식을 듣고 즉시 출발하여 10월 6일 밀라노에 승리의 입성을 했다. 트레불치오 원수는 도시 열쇠를 넘겨주었고, 임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이후 조르주 당부아즈 추기경이 정식 총독이 되었다. 루이 12세는 밀라노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존 스포르차 세금의 3분의 1을 감면해주었다.

한편,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스위스 용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모아 1500년 1월 중순 밀라노 공국으로 반격해왔다. 스포르차의 귀환 소식에 밀라노 일부 시민들이 봉기하자, 트레불치오 원수는 도시 방어를 포기하고 서쪽 요새로 후퇴했다. 스포르차는 2월 5일 지지자들의 환영 속에 밀라노에 재입성했다. 루이 12세는 루이 드 라 트레무아유가 이끄는 군대를 다시 파견했다. 이 군대는 밀라노 서쪽 요새에 도착했을 때 병력 모집을 통해 30,000명으로 불어났으며, 상당수가 스위스 용병이었다. 그러나 스위스 연방 정부가 동족 간의 전투를 금지하면서 양측의 스위스 용병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는 스위스 용병 의존도가 높았던 스포르차 군대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스포르차는 다시 밀라노를 탈출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남은 생을 프랑스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루이 12세는 스포르차에 대한 밀라노 시민들의 환영(루이 12세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관대한 정책을 폈다. 스포르차 치하에서 금지되었던 곡물 수출을 재개하여 밀라노는 10년간 번영을 누렸고, 12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밀라노를 확보한 루이 12세는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제노바는 루이 12세의 사촌 클레베의 필리프를 새로운 총독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샤를 8세의 후계자 자격으로 나폴리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밀라노에 대한 주장보다 법적 근거는 약했지만, 루이 12세는 강력하게 이를 추진했다.

나폴리 원정에 앞서 루이 12세는 북부 이탈리아의 피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피사는 1406년 피렌체에 정복된 이후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고, 1494년에는 피렌체 총독을 몰아냈다. 오랜 동맹이었던 피렌체는 프랑스에 피사 재점령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루이 12세는 최근 스포르차와의 전쟁에서 피렌체가 중립을 지킨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폴리 원정을 위해 피렌체 영토 통과 허가가 필요했기에, 프랑스군은 피렌체군과 함께 1500년 6월 29일 피사를 포위했다. 프랑스 포병이 성벽 일부를 파괴했지만, 피사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7월 11일 프랑스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피사 공략 실패는 이탈리아 내 프랑스 반대 세력을 고무시켰고, 나폴리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특히 스페인과의 관계 정리가 필요해졌다.

1500년 11월 11일, 루이 12세는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와 그라나다 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리 왕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스페인이 이탈리아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루이 12세가 강력한 경쟁자인 스페인을 이탈리아로 끌어들여 스스로를 약화시키고 동맹들을 잃었으며, 교황 세력을 키워주는 등 전략적 실책을 범했다고 비판했다.[8]

나폴리 왕국의 절반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루이 12세는 1501년 6월 초, 오비니의 버나드 스튜어트가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했다. 로마에 도착한 프랑스-스페인 대사들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그라나다 조약을 알렸고, 교황은 이를 승인하며 루이 12세와 페르난도 2세를 나폴리의 공동 군주로 인정했다. 나폴리 국왕 페데리코 1세는 이 소식을 듣고서야 자신이 사촌 페르난도에게 배신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카푸아를 통과하며 잔혹한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고, 이 소식이 퍼지자 남부 이탈리아의 저항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페데리코는 도주했고 프랑스군은 저항 없이 나폴리에 입성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예측대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폴리 분할에 대한 이견으로 1502년 초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고, 4월에는 프랑스군이 풀리아의 스페인군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결국 1504년 프랑스는 나폴리를 완전히 상실했다.

''Litterae super abrogatione pragmatice sanctionis'', 1512


루이 12세의 마지막 주요 전쟁은 캉브레 동맹 전쟁(1508–1516)이었다. 이번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주된 적이었다. 프랑스군은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510년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신성 동맹을 결성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9] 신성 로마 제국, 아라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등이 신성 동맹에 가담하자 프랑스는 점차 이탈리아에서 밀려났고, 결국 1513년 스위스 용병에 의해 밀라노마저 잃게 되었다.

이러한 대외 전쟁에도 불구하고, 루이 12세는 국내 문제에서는 재정 개혁(1504년), 세금 동결 및 징수 과정 개선(1508년) 등 노력을 기울여 프랑스 내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1506년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에서는 '국민의 아버지'(Père Du Peuple프랑스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3. 4. 국내 정책과 '국민의 아버지' 칭호

1514년 동전에 새겨진 루이 12세


루이 12세는 여러 차례 비용이 많이 드는 이탈리아 전쟁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문제 해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프랑스의 법률 체계를 개혁하고 세금을 감면하며 정부 운영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구체적으로 1499년 블루아 칙령과 1510년 리옹 칙령을 통해 왕실 판사의 권한을 확대하고 법조계의 부패를 억제하고자 했다. 복잡했던 프랑스 관습법은 블루아 칙령으로 성문화되었다. 재정 면에서는 1504년 재정 개혁을 실시하고 1508년에는 세금을 동결했으며, 세금 징수 절차를 개선했다. 특히 리옹 칙령은 세금 징수원이 징수한 세금을 8일 이내에 정부에 전달하도록 의무화하고, 위반 시 벌금과 직위 해제 처분을 내리는 등 징수 시스템을 강화했다. 루이 12세는 감세로 인한 재정 부족분을 귀족과 외국 공작에 대한 연금을 삭감하여 충당했다.

종교 정책에서는 부르주 국사 조칙을 다시 시행하여, 프랑스 가톨릭교회 주교 임명권을 국왕이나 프랑스 관료가 갖는 갈리아 교회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강력한 부르봉 가문을 포함한 귀족들을 능숙하게 관리하여 프랑스 정부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의 통치 하에 브르타뉴는 사실상 프랑스의 영구적인 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루이 12세는 프랑스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군사적, 외교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기 있는 왕이었으며, 역사가들은 그의 인기가 주로 감세 정책 덕분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통치 말기 왕실 재정 적자는 선왕 샤를 8세 시기보다 늘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 중에도 재정 관리에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1506년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는 그에게 '국민의 아버지'(Père Du Peuple프랑스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는 프랑스 왕에게 이 칭호가 부여된 유일한 사례이다.[16] 비록 후임자인 프랑수아 1세가 세금을 다시 인상했지만, 루이 12세의 법률 개혁과 고등 법원 창설 등은 더 오래 지속되었다.

3. 5. 사망과 왕위 계승

1514년 1월 왕비 안 드 브르타뉴가 사망하자, 루이 12세는 잉글랜드를 대불 동맹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같은 해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와 결혼했다.[26] 그러나 이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1514년 12월 24일, 루이 12세는 통풍이 심하게 악화되었다고 전해지며, 1515년 1월 1일 이른 아침 마지막 성사를 받은 뒤 그날 저녁 늦게 사망했다.[26]

1월 11일, 루이 12세의 시신은 장례 미사를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다음 날 장례 행렬 중 관을 실은 마차가 고장 나고, 관을 덮은 금색 천을 누가 가질 것인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루이 12세는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루이 12세와 브르타뉴의 안 묘가 그를 기리고 있다.

루이 12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위 계승은 여성의 왕위 계승을 허용하지 않는 살리카법을 따랐다. 그 결과, 왕위는 그의 종질이자 사위였던 앙굴렘 백작 프랑수아가 프랑수아 1세로 즉위하며 계승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앙굴렘 백작 샤를과 사보이의 루이즈의 아들이었으며, 루이 12세의 장녀인 프랑스의 클로드와 결혼한 상태였다. 루이 12세는 야심을 가진 사위 프랑수아를 끝까지 경계했다고 전해진다.[26]

한편,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은 여성의 고유 권리(suo jurela)에 의한 상속을 허용하는 반(半)살리카 전통을 따랐다. 안 드 브르타뉴 왕비가 루이 12세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그들의 장녀인 프랑스의 클로드는 루이 12세의 사망 전에 이미 브르타뉴 공국을 자신의 고유 권리(suo jurela)로 직접 상속받았다. 클로드가 프랑수아 1세와 결혼했을 때, 프랑수아 1세는 아내의 권리(jure uxorisla)에 따라 브르타뉴의 관리자가 되었다. 이는 브르타뉴가 프랑스 왕국의 일부로 남게 되고 왕국의 통일성이 유지되도록 보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유산

루이 12세의 통치 아래 브르타뉴 주는 사실상 프랑스의 영구적인 주로 편입되었다. 법적인 통합은 1547년에 완료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여러 차례 비용이 많이 드는 군사 원정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치 말년의 왕실 적자는 1498년 샤를 8세의 뒤를 이었을 때보다 더 크지 않았다. 1504년과 1508년의 재정 개혁은 세금 징수 절차를 강화하고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군사적, 외교적으로는 실패를 겪기도 했지만, 루이 12세는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왕이었다. 역사가들은 그의 인기가 주로 감세 정책 덕분이라고 평가한다. 후임자인 프랑수아 1세가 결국 세금을 다시 인상했지만, 루이 12세가 추진한 법전 개정과 새로운 고등 법원 창설은 더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그는 1506년 삼부회에서 "국민의 아버지"(Le Père du Peuplefra)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프랑스 왕에게 이러한 특정 존칭이 부여된 유일한 사례이다.[16]

5. 평가

루이 12세 치하에서 프랑스 왕실에 대한 선전 활동이 활발해졌다. 루이 12세는 통치 기간 동안 결혼식, 장례식 등 여러 행사를 통해 대규모 의식을 자주 거행했다. 이러한 의식은 왕의 권위를 드러내고 도상학을 이용하여 왕의 이미지를 높이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루이 12세 시기에는 검열이 비교적 느슨하여 많은 작가들이 왕을 칭송하는 글을 널리 퍼뜨렸다.

루이는 고슴도치를 개인 문장이자 왕가를 상징하는 동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왕실의 상징이 된 고슴도치는 삽화 필사본, 건축물, 심지어 대포에도 새겨질 정도로 널리 사용되었다.[10] 당시 사람들은 고슴도치가 가시를 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는 왕의 공격 능력과 방어 능력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11] 이탈리아 정복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 왕국을 강력하고 무적의 존재인 고슴도치로 묘사하여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는 공격적인 이미지 대신 고슴도치를 단순히 왕가를 식별하는 문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루이는 자신을 경건하고 기사도적인 왕으로 포장하고자 루이 9세와 같은 성군과 비교하며, 군사적 힘보다는 정의와 개혁에 힘쓰는 통치자임을 강조했고, "국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2]

블루아 성에 새겨진 루이 12세의 상징 고슴도치


루이의 이니셜 'L'은 종종 열린 왕관과 백합으로 장식되었다. 그의 개인적인 색상인 빨간색과 노란색(또는 금색)은 근위 연대의 제복, 필사본의 색 구성, 깃발 등에 널리 사용되어 왕실의 색임을 나타냈다.[13]

루이는 국가 초상화를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14] 그는 여러 화가를 고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작은 초상화들을 제작하게 했으며, 이는 오늘날 필사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14] 1514년에는 프랑스 최초로 왕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발행되면서 선전 수단이 더욱 다양해졌다.[15] 밀라노 공작 시절의 루이 12세는 알비제 데 도나티(Alvise de Donati)의 그림에 묘사되기도 했다. 이 그림은 현재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원래 카스파노의 산 바르톨로메오 성당에 있었다. 그림 속에서 프로방스 백작과 백작 부인으로 묘사된 프랑스 왕 부부는 무릎을 꿇고 있으며, 왕은 밀라노 조폐국에서 만든 동전에 나타나는 왕관을 들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가 그린 프랑스 왕의 유일한 전신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루이 12세의 통치 아래 브르타뉴는 사실상 프랑스의 영구적인 일부가 되었으며, 법적인 통합은 1547년에 이루어졌다. 여러 차례의 비용이 많이 드는 이탈리아 전쟁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말기 왕실 적자는 샤를 8세로부터 왕위를 계승했을 때보다 늘어나지 않았다. 1504년과 1508년에 이루어진 재정 개혁은 세금 징수 절차를 강화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군사적, 외교적으로는 실패를 겪기도 했지만, 루이 12세는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왕이었다. 역사가들은 그의 인기가 주로 세금을 줄여준 정책 덕분이라고 평가한다. 후임자인 프랑수아 1세가 다시 세금을 올렸음에도, 루이 12세가 추진한 법전 개정과 새로운 고등 법원 설립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는 1506년 삼부회에서 "국민의 아버지"("''Le Père du Peuple''")라는 존칭을 받았는데, 이는 프랑스 역사상 왕에게 이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된 유일한 사례이다.[16]

한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에서는 그가 병약하고 평범한 지적 능력을 가졌으며, 의지가 약해 왕비 안과 측근인 조르주 당부아즈 추기경에게 휘둘렸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26]

6. 가족 관계

루이 12세는 샤를 5세의 손자인 오를레앙 공작 샤를과 그의 세 번째 부인 마리 드 클레브 사이에서 1462년 6월 27일 블루아 성에서 태어난 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샤를은 백년 전쟁아쟁쿠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잉글랜드 왕국에서 25년간 포로 생활을 했으며, 루이가 태어났을 때는 67세였다.[26] 루이가 두 살이던 1465년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어린 나이에 오를레앙 공작위를 계승했다.[3]

루이 12세는 총 세 번 결혼했다.

=== 잔 드 프랑스와의 첫 결혼과 이혼 ===

1476년, 당시 프랑스 국왕이자 사촌인 루이 11세의 명령으로 그의 딸 잔과 결혼했다.[26] 루이 12세는 처음부터 잔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며, 1498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잔과의 혼인을 무효로 하고자 했다.

결혼 무효 소송은 "당대 가장 추악한 소송 중 하나"로 묘사될 만큼 순탄치 않았다. 루이는 근친혼이나 결혼 적령 미달을 주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잔이 신체적으로 기형이며 이로 인해 부부 관계를 완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잔은 루이가 과거 자신의 잠자리 능력을 자랑했던 증언들을 제시하며 강하게 반박했다. 루이는 심지어 마법에 걸려 성관계를 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교황청이 중립적이었다면 잔이 유리했을 것이나,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루이 12세와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하여 루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교황은 루이가 잔의 아버지 루이 11세에 의해 강제로 결혼했음을 근거로 1498년 12월 혼인 무효를 선언했다. 잔은 이 결정에 분개했지만 받아들였고, 이후 수녀가 되어 부르주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녀는 1950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안 드 브르타뉴와의 두 번째 결혼 ===

이혼 후 루이 12세는 1499년, 선왕 샤를 8세의 왕비였던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했다. 이는 프랑스 왕국이 브르타뉴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략 결혼이었다. 안은 이전 샤를 8세와의 결혼에서 여러 차례 유산과 사산을 겪었으며, 루이 12세와의 사이에서도 여러 아들을 사산했지만 두 딸을 낳아 길렀다.

장녀 클로드(1499–1524)는 어머니 안의 뜻에 따라 어린 시절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카를 5세와 약혼했다. 하지만 루이 12세에게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왕위 계승 문제를 고려하여 루이는 이 약혼을 파기하고 클로드를 자신의 추정 상속인이자 사촌인 앙굴렘 백작 프랑수아와 약혼시켰다. 이는 브르타뉴가 프랑스 왕실과 계속 통합된 상태로 남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안은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그녀가 1514년 사망한 후 클로드와 프랑수아는 결혼했다. 클로드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었고, 남편 프랑수아가 왕위에 오르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차녀 르네(1510–1575)는 이탈리아의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2세와 결혼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클로드1499년 10월 14일1524년 7월 20일1514년 5월 18일 프랑수아 1세와 결혼. 자녀 출산.
이름 없는 아들1500년 말/1501년 초유아기에 사망Père Anselme는 1501년 루이 12세가 아들과 카스티야의 필리프 1세의 딸 중 한 명과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le cardinal dAmboise''"를 트렌티노로 보냈다고 기록한다.[17]
이름 없는 아들1503년 1월 21일1503년 1월 21일Journal de Louise de Savoie는 "Anne reine de France"가 블로아에서 1월 21일에 "un fils...il avoit faute de vie"를 낳았다고 기록한다.[18] Kerrebrouck은 이 사건을 "'à lissue dn voyage à Lyon"이라고 기록했다.[19]
르네1510년 10월 25일1574년 6월 12일1528년 4월 에르콜레 2세 데스테와 결혼.[20] 자녀 출산.
이름 없는 아들1512년 1월1512년 1월Père Anselme은 두 번째 아들 "mort en bas âge"을 기록한다.[17] Kerrebrouck은 아들 "mort-né au château de Blois janvier 1512"를 기록하며,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루이 12세를 파문한 후 "[la] grossesse [de la reine] tourne mal"이라고 언급했다.[19] 이 출생은 Journal de Louise de Savoie에 언급되지 않았다.[21]


  • ''위 표는 안 드 브르타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다.''


=== 메리 튜더와의 세 번째 결혼 ===

1514년 1월 왕비 안이 사망하자, 루이 12세는 그해 10월 9일 프랑스 아베빌에서 잉글랜드의 공주 메리 튜더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메리는 당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여동생이었다. 이 결혼은 신성 동맹에서 잉글랜드를 떼어내려는 정치적 목적과 더불어, 여전히 아들이 없었던 루이 12세가 후계자를 얻으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짧았고 자녀를 낳지 못했다. 루이 12세는 메리와 결혼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1515년 1월 1일에 사망했다. 사인은 통풍의 영향으로 추정되지만, 젊은 왕비와의 잠자리에서 기력이 쇠했다는 소문도 있었다.[26]

=== 사생아 ===

루이 12세는 1505년경 사생아 미셸 뷔시(Michel Bucy프랑스어)를 두었다. 미셸 뷔시는 부르주 대주교가 되었으나 1511년에 사망하여 부르주에 묻혔다.[22]

7. 루이 12세를 다룬 작품


  • 월터 스콧의 1823년 소설 ''퀸틴 더워드''에서는 오를레앙 공작 시절의 루이 12세가 등장하며, 잔 드 프랑스 공작부인과의 결혼 계약을 파기하려 시도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 Canal+의 드라마 시리즈 보르지아에서는 영국의 배우 조셉 비티가 루이 12세를 연기했다. 극중 루이는 샤를 8세나폴리 계승 주장을 이어가며, 체사레 보르지아의 도움으로 밀라노 공작으로 즉위한다. 초기에는 체사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체사레의 야심이 프랑스의 이익과 충돌하고 그의 잔혹한 방식이 드러나면서 관계는 악화된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즉위하고 체사레가 몰락하자, 루이는 그에게 프랑스로의 망명을 제안하지만, 체사레는 이를 거부한다.
  • 미국 드라마 ''튜더스''의 첫 번째 시즌에는 루이 12세의 마지막 결혼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으나, 상당 부분 각색되었다.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는 조카 메리 1세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마가렛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또한,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 설정 오류(프랑수아 1세가 이미 왕으로 등장)를 맞추기 위해, 메리의 남편으로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른 가상의 포르투갈 왕(당시 포르투갈 왕과는 전혀 닮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며, '마가렛'이 베개로 그를 질식시켜 살해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결혼 생활이 매우 짧게 끝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설정이다.
  • 사토 켄이치의 소설 『왕비의 이혼』에서도 루이 12세를 다루고 있다.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the Middle Ages: A-J
[2] 간행물 The Eclectic Magazine of Foreign Literature, Science, and Art, Volume 33
[3] 서적 The Lost Tapestries of the City of La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 서적 The Counts of Laval: Culture, Patronage and Religion in Fifteenth-and Sixteenth Century France Ashgate Publishing Ltd
[5] 서적 La spedizione di Carlo VIII in Italia Mancia del Commercio di M. Visentini
[6] 서적 L'Historia di Milano Giorgio de' Cavalli
[7] 서적 Spain: A Modern History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8] 서적 The Prince A Norton Critical Edition
[9] 서적 A History of Venice https://archive.org/[...] Vintage Books
[10] 논문 Ensigns of Authority: French Royal Symbolism in the Age of Louis XII 1983
[11] 논문 Louis XII and the porcupine: Transformations of a royal emblem 2001
[12] 논문 Louis XII and the porcupine: Transformations of a royal emblem
[13] 논문 Ensigns of Authority: French Royal Symbolism in the Age of Louis XII.
[14] 논문 Ensigns of Authority: French Royal Symbolism in the Age of Louis XII.
[15] 논문 Ensigns of Authority: French Royal Symbolism in the Age of Louis XII.
[16] 논문 Ensigns of Authority: French Royal Symbolism in the Age of Louis XII 1983
[17] 서적 Histoire généalogique et chronologique de la maison royale de France [Genealogical and chronological history of the royal house of France] Paris: La compagnie des libraires
[18] 간행물 Journal de Louise de Savoye
[19] 서적 Les Valois (Nouvelle histoire généalogique de l'auguste Maison de France)
[20] 서적 Cambridge Medieval History, Shorter: Volume 2, The Twelfth Century to the Renaiss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1] 간행물 Journal de Louise de Savoye
[22] 서적 De la maison royale de France Renouard, Libraire, rue-Saint-Andre-Des-arcs
[23] 서적 Répertoire de personnages apparentés à la couronne de France aux XIVe et XVe siècles Publications de la Sorbonne
[24] 서적 The illuminated page: ten centuries of manuscript painting in the British Library
[25] 웹사이트 Louis XII king of France https://www.britanni[...]
[26] 백과사전 Louis XII. of Franc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